전봉준의 진술이 기록된 전주 감영지, 지금 그 자리에 가보면

전봉준의 ‘옥중 진술’이 작성된 진짜 장소는 어디였을까요? 그리고 그 공간은 오늘날 어떻게 남아 있을까요?

전봉준이 동학농민혁명 후 체포되어 심문을 받은 전주 감영지는, 단순한 관아 유적이 아니라 ‘기록이 쓰인 공간’으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그가 실제로 진술한 장소로 추정되는 전주 감영지의 현재 위치와 구조를 현장 고증을 바탕으로 설명하며, 답사자의 시선으로 공간의 긴장감과 역사적 울림을 함께 조명합니다.



전주 감영지란 무엇인가?

전주 감영은 조선시대 전라도 관찰사의 관청으로, 객사와 내아, 조사실, 옥사 등으로 구성된 복합 행정시설이었습니다. 1894년 동학농민군에 점령되었고, 이듬해 전봉준이 체포되어 1차·2차 진술을 남긴 장소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현재 위치와 유적 구조는?

현 전주 한옥마을 내 ‘치명자산 성지’ 입구 인근 공터가 전주 감영지의 유력한 후보지로 확인됩니다. 눌제구길 일대와 전주천 인근 지번이 조선시대 전주읍지와 일치하며, 실제 현장에선 옥사 흔적과 기와 파편, 벽돌이 출토된 바 있습니다.

감영지 안내판과 유적지점에는 ‘전봉준 진술지’라는 해설이 함께 제공되어, 역사적 고증과 경험이 연결됩니다.

전봉준 진술 기록과 공간 연결

전봉준은 이곳 조사실에서 고부 군수 조병갑에 대한 항거 배경, 동학 농민군의 조직적 목표, 전라도 민중의 요구사항 등을 상세히 진술했습니다. 공간적으로는 어두운 방 안에서의 고립감과 심문 상황의 긴장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구조였습니다.

그가 진술한 구절 중 “이 몸 죽어도 민심이 나를 따를 것이니, 그 뜻은 천심이다”는 기록은 단순 텍스트를 넘어 현장에 각인된 감정입니다.

현장 체험 가이드

감영지 추정지는 전주한옥마을 북서쪽에 위치해 있으며, 현재 공원과 안내판으로 정비되어 있습니다. 안내판에는 객사터, 조사실 위치, 전봉준 진술 요약이 표기되어 있어, 유적의 실제 공간감을 느끼기에 적합합니다.

옥사 위치 추정 지점에선 전봉준 진술문 일부를 낭독하거나, 그 공간에 서서 당시를 상상해보는 방법이 좋습니다.

문화재 보존과 역사 활용

감영지 자체는 아직 문화재로 지정되진 않았으나, 전주한옥마을 전체가 민속문화재 보호 구역이며, 감영지는 역사 콘텐츠화가 진행 중입니다. 향후 AR 조사실 복원, 인터랙티브 전봉준 인터뷰 체험 등이 기획되고 있습니다.

맺음말: 공간과 기록의 교차점

전봉준의 진술은 기록 속 텍스트로만 남지 않았습니다. 그 글이 쓰였던 방, 조사실, 그리고 공간은 지금도 전주 감영지에 남아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도 전주를 찾으신다면 그 장소 앞에서 ‘기록이 탄생한 공간’의 무게를 직접 체험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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