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칠세부동석의 유교 사회, 여성의 건강은 누가 돌봤을까요?
조선 초기, 여성 환자를 위해 국가가 직접 여성 의료인을 양성한 제도—‘의녀’가 그 해답이었습니다.
의녀는 조선시대 여성 의료인의 공식 명칭으로, 1406년 태종 대에 국가 주도로 도입되었습니다. 창덕궁 내 내의원과 도성 내 혜민서에 소속되어 여성 환자 진료를 담당했고, 교육·시험·승진 체계도 확립되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의녀 제도의 시작과 구조, 창덕궁·혜민서에서의 역할, 그리고 역사적 의미를 살펴봅니다.
의녀 제도의 탄생과 제도화
의녀는 조선 태종 6년(1406), 허도(許衜)의 상소로 제생원에서 시작되어 내의원·혜민서로 확대 정착되었습니다. 이는 여성 환자가 남성 의원에게 진료받기 어려운 사회적 한계를 국가가 제도적으로 보완한 조치입니다.
창덕궁 내 내의원: 왕실 여성 의료의 중심
내의원 소속 의녀는 왕비, 공주, 세자빈 등 왕실 여성의 진료를 담당하며, 침구·진맥·간호·약제 조제 업무를 수행했습니다. 시험과 교육으로 선발된 이들은 내의원에서 정식 의료 보조 역할을 맡았습니다.
혜민서: 도성 일반 여성의 공공의료기관
혜민서는 빈민과 일반 도성민을 위한 의료기관으로, 의녀들이 여성 환자 진료를 담당했습니다. 이들은 약국 관리, 위생 행정까지 포함한 업무를 수행했으며, 내의원보다 더 다양한 계층의 환자를 상대했습니다.
의녀의 교육과 업무 범위
의녀는 침술·진맥·약제 조제, 산과 진료를 수행했습니다. 세종대에는 교육과 교재(맥경, 산서, 침구)가 체계화되었으며, 여성 범죄 피해자 감식과 궁중 의례, 간병 업무 등 다기능 역할도 병행했습니다.
사회적 지위와 역사적 의미
의녀는 천민 계급에서 선발되었지만 교육과 시험을 통해 의료 분야 전문인으로 성장하며 사회적 지위를 얻었습니다. 이는 여성의 전문직 사회 진출의 초석이었으며, 조선 후기 더 많은 여성 의료인 배출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답사 팁: 창덕궁 후원과 혜민서 터 탐방
동궐도나 정원 안내판을 참고해 내의원 터와 궁중 온돌방 자리를 유추해보세요. 또한 창덕궁 ‘후원’(비원)은 사전 예약 후 해설을 통해 관람할 수 있으며, 그 구조와 운영방식을 통해 의녀 활동 공간을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맺음말
조선의 의녀 제도는 여성의 몸과 삶을 돌본 최초의 공식적 시도였습니다. 유교 사회 속에서도 전문교육을 받고 공적 의료에 참여한 여성 의료인의 역사는, 오늘날 여성 의료인의 뿌리로 재조명할 가치가 있습니다.